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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찰의 한국침투에 대한 고찰

지금까지 1877년 개항 직후부터 총독부의 사찰령이 공포되는 1911년 6월 이전까지 일제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침략의 선행 단계로써 감행된 일제의 불교침략사를 살펴보았다. 여기서 종교와 제국주의의 결합 양상을 찾아볼 수가 있었으며 일본 불교 종파들의 한국 불교계 침략은 정치권과 밀접하게 결탁되어 있었으며, 정치권의 지원을 받아서 사전에 치밀한 계획하에 감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명치유신 초기에 국가로부터 배척받았던 일본 불교계는 그 타개책으로 국가권력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국가권력도 식민지 개척을 위해서는 종교적인 침략을 선행시키는 것이 용이하리라는 발상이 서로 부합된 결과로 식민지 개척의 첨병으로서 불교를 택하게 되었다. 일본 불교계에서는 포교승들에게 먼저 언어습득, 풍속연구 ..

역사 정리 2025.02.21

개항기 일본 불교 종파들의 한국 사찰에 포교소 설치/운영

1) 일본 불교 종파들의 한국 사찰(寺刹)과 별원(別院)및 포교소(布敎所) 설치  개항기 일본 불교세력의 한국 침투는 1877년 진종 대곡파 본원사의 부산 별원 설치를 시작으로 해서 한반도 전역에 걸쳐서 무수한 일본 사찰과 별원 및 포교소, 설교소 교회소 등을 설치하였다. 별원 및 포교소의 설치요건으로써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철도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해로(海路)가 쉽게 통할 수 있는 항구를 골랐으며, 철도가 개설된 이후에는 교통의 요지를 택했다. 비록 현재 상황이 인구가 적고 촌락에 지나지 않더라도 행정상의 주요 지점,그리고 상업지를 택했다. 80) 이러한 사실로서도 정치적, 경제적 침략을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방편으로 종교침략을 선행시킨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일단 별원이나 포교소의 위치..

역사 정리 2025.02.19

개항기 일본 불교 종파들의 한국 교세 확장기 정리

2) 교세확장기(1895-1906)  일제의 한국 침략은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과 1904년 노일전쟁(露日戰爭)을 기점으로 해서 그 성격이 달라지고 있다. 일제는 청일전쟁의 승리를 통하여 라이벌인 청국을 결정적으로 밀어내고 전쟁 목적이었던 조선의 '보호국화(保護國化)'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기 때문이다. 46) 1904년년 노일전쟁(露日戰爭) 이후 일제는 한국 침략을 독점하였다. 최근에는 1894년부터 정치, 군사, 경제적으로 일제의 반식민지화(半植民地化)가 되었고 1904년부터는 준식민지(準植民地) 상태로 전락되었다. 47)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불교계의 침략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그 성격과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1895년 일련종의 승려 좌야전려(佐野前勵)는 한국 불교인들을 ..

카테고리 없음 2025.02.15

개항기 일본 불교 종파들의 한국 침투과정 정리

일본 불교의 특성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호국적인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주의와 쉽게 결합될 수 있었다. 28) 불교가 일본에 처음 유입되었을 때는 일본 고유의 신지사상(神紙思想)과 종종 분쟁이 있었지만 세월이 지남에 따라 불교가 정착하게 됨에 따라서는 신불동체(神佛同體) 사상인 본지수적(本地垂迹) 29) 사상이 형성되어 겸창시대(鎌倉時代)에 가서는 하나의 학설로 정착되게 되었다. 30)그런데 명치시대에 들어와서 종래 에도시대(江戶時代)에 정권의 비호를 받으면서 귀족화되었던 승려세력(僧侶勢力)은 수난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른바 '폐불훼석(廢佛毁釋)'이라 불리는 신불분리(神佛分離) 운동이 전개되는 것이다. 여기에 에도시대(江戶時代)말기에 단가제도(檀家制度) 32)의의 모순이 노정되자 명치 ..

역사 정리 2025.02.13

개항기 한국 불교계 동향 정리

1. 개항기 한국 불교계(佛敎界)의 동향(動向)  조선 초기부터 개항기에 이르는 사이에 불교는 조선왕조 정부로부터 거듭되는 탄압을 받아 겨우 잔명(殘命)을 유지할 정도였으며 사찰에서는 관(官)으로부터 지물(紙物)을 비롯해서 고사리, 도라지, 무나물 등 각종 산나물과 잣, 버섯, 미투리 등 무리한 공물의 상납과 축성(築城), 토목공사(土木工事), 산성수비(山城守備) 등 온갖 잡역7)에 시달려야 했다. 뿐만 아니라 승려들은 차별과 천대받는 계층에 속했기 때문에 양반(兩班), 이속배(吏屬輩)들로부터도 갖은 멸시와 수탈을 당해야 했다. 8)  1876년 외세의 강압으로 인하여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었던 조선왕조 정부는 1899년 (광무(光武) 3년)에 동대문(東大門) 밖에 원흥사(元興寺) 9)를 세우고 1..

역사 정리 2025.02.11

개항기 일본 불교의 한국 침투

근대 한국 불교사에 있어서 개항기는 조선왕조 정부의 국시(國是)인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말미암아 교세가 위축되어 산간으로 밀려나 겨우 잔명(殘命)을 유지하던 수난시대(受難時代)로부터 식민지 강압책인 '사찰령(寺刹令)'에 예속되어 헤어나지 못했던 '교권종속시대(敎權從屬時代)'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이 해명되어야 할 시기이다. 그러나 근대 한국 불교사 연구에 대한 기존의 연구동향 1) 은 대체로 일제의 사찰령(寺刹令)의 침략적 성격과 거기에 대응한 한국 불교계(佛敎界)의 반응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왔다.따라서 개항기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전초작업으로써, 제국주의의 첨병으로서 불교를 인식한 연구는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개항기 일제의 불교침략사에 대한 연구는 1980년대..

역사 정리 2025.02.09

자치통감강목의 의의

주희는 司馬光과 동일한 시기를 다루면서도 ‘강목체’라는 창의적 史體를 통해 『자치통감강목』을 기획, 편찬하였다. 그렇지만 『통감』이 勅撰인데 비해, 『강목』은 私撰이다. 『통감강목』이 완성되던43세(1172) 때에 사록관으로 집에 있으면서 중앙 조정에서 누차 소명하였음에도 나아가지 않고 저술작업을 계속하던 때였다. 天理로 역사를 해석하고 역사를 통해 경전을 연구하는 송대 지식인의 경사관과 역사관에 기초한 저서가 『통감강목』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지식계층의 성장 및 자신들의 이념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확신에 기초한 자기의식을 전제하지 않고는 『강목』의 편찬을 이해하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자치통감』을 母本으로 하면서도 范祖禹의 『唐鑑』과 胡寅의 『讀史管見』을 대폭 수용하여 종합한 것이 『자치통감강목..

역사 정리 2025.02.07

자치통감강목의 사학사적 소고

중국의 사서 체제는 기전체와 編年體 이외에 紀事本末體와 綱目體도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체제는 『資治通鑑』을 개편하여 구체화시킨 것으로 '통감학'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袁樞의 『通鑑紀事本末』과 朱熹의 『資治通鑑綱目』이다.   물론 기사본말체는 기전이나 편년의 단점을 극복하여 편년체의 연대를 經으로 삼아 시간 관계를 명확히 밝히고 인물 또한 사건 중심의 주제에 관하여 그 본말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선진 시대에 이미 나타났으며 한 대에 본말체 형식의 서술이 성립되었다고 하지만 전문적인 본말체의 형식을 빌린 것은 남송 시대부터였고, 강목체도 선진 시대에 나타났으며 주희도 강(綱)은 『春秋』를 모방하고 목(目)은 『左氏傳』을 받아들였다고 하듯이 이미 있었던 서술방법이었다. 『資..

역사 정리 2025.02.05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

1) 시초 축적자본주의적 생산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생산자가 생산수단에서 분리되고, 그 분리된 생산자가 임노동자로 전화하는 과정이 전개되어야 한다.(‘시초 축적’)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리 과정은 먼저 농민에게서 토지를 빼앗는 방식으로 진행. 영국의 경우, 15세기에 이르면 농노제 해체와 더불어 종래의 ‘표준적’인-즉30 에이커 안팎의 경작지를 보유한- 봉건 농민은 사실상 사라졌고 그 대신 토지 보유 면적 및 보유 방식 면에서 다양한 층위의 농민 집단들이 출현. 그 후 새로운 국제무역의 발전과 더불어 플랑드르 및 영국의 이스트 앵글리아 지방에서 모직물공업이 번창하여 양모 수요가 증가하자, 일부 지주들이 다투어 농지를 목양장으로 바꿔. 그들은 소작 농민의 토지를 회수하고 울타리를 친 후 초지를 조성..

카테고리 없음 2025.02.03

초기 자본주의란?

16~18세기는 유럽의 역사에서 자본주의 이행기. 15세기말세기 말 이래 유럽인의 식민활동과 더불어 유럽을 중심으로 동양과 신대륙을 연결하는 국제무역 성립, 유럽 내부의 경제활동 자극. 근대 초기의 자본축적은 처음부터 유럽의 경계를 넘어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 유럽 여러 지역에서 시장을 위한 생산 활동이 활발해져 다양한 상업적 농업 발전. 수공업 분야에도 판매를 목적으로 생산조직이 도시의 경계를 넘어 농촌까지 확대, 장기적으로 임노동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나아감. 한편, 16~17세기에는 국민을 단위로 하는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가 출현. 이 지배 체제는 처음에는 국제무역의 발전과 시장경제의 확대에 힘입었고 또 그 발전에 기여. 특히 이 시대에 여러 나라들이 다투어 시행한 중상주의 정책은 근대 초기..

역사 정리 2025.02.03

조선시대 중후기 간통죄 처벌과 신분에 따른 간통죄 처벌

1.    조선 중․후기의 간통형법과 처벌  조선시대의 간통에 관한 규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강화되었다. 16세기 중종 대와 17세기 후반 숙종 대를 기점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조선 전기까지는 사족녀와 양, 천녀 간의 간통 처벌의 형량에는 차이가 없었지만, 중종 7년에 사족녀가 간통을 할 시에 그 간통한 남자와 함께 교형에 처하도록 하는 법이 제정된 후 그것이 유지되었다. 일반 양녀의 경우도 조선 전 기간을 통해 별도의 법규가 없었지만, 중종 대 이후부터 방탕한 여성에 대한 처벌규정을 확대 적용하여 양녀의 간통에 대해서도 대명률의 규정보다 가중 처벌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이는 지방관의 관비 확보라는 목적과 성종, 중종 대를 거치면서 양인계층까지 파급된 성리학적 이념과 정절관념과 관련 있을 것..

역사 정리 2025.02.03

조선시대 전기 간통죄에 대한 처벌

간통이라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며 행하는 범죄 중에서 항상 우리 곁에 있는 범죄 중 하나이다. 이러한 간통은, 결혼하여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배우자가 아닌 사람과 성적 관계를 맺는다고 사전에서 일컫는다. 때문에 어느 시대, 어느 국가를 불문하고 간통을 한다면 도덕적으로 문제 있다고 판단하고 처벌한다. 하지만, 이것이 이제는 제도적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이라는 문제로 여겨져서, 점차 간통죄가 폐지되려는 추세이다.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윤리적, 사회적으로 문란하고 음란한 것을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아직까지 간통죄에 대한 처벌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역사상 성리학적 이념이 가장 강하게 제도나 관습적으로 존재했던 보수적인 국가인 조선에서도 역시 간통을 행한 사례가 있었을 터이다. ..

역사 정리 2025.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