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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광해군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앞선 포스팅에서와 같이, 광해군은 실정을 하였고, 또 대단한 치적도 이루었다. 그의 행적에 관해 평가하기 전에 광해군에 대한 기록은 승자에 의해 작성된 기록이다. 그리고 인조반정을 일으킨 사람들은 쿠데타가 아닌 반정이기에, 반정에 따른 명분에서도 광해군에 대해 왜곡했어야만 했다.   필자는 광해군이 분조를 한 것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위험한 전쟁터에서 목숨을 무릅쓰고 적들과 싸우고 상처받은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또 그때 분조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더라면, 조선이라는 나라는 물론 현재 우리나라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분조가 있기에 의병군도 생겨났고, 백성들도 세자도 저렇게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데 우리가 우리나라를 지키지 않으면 누가 조선을 지키겠는가?라는 마음을 가지고 싸웠을 것이다...

역사 정리 2025.01.06

광해군에 대해 공부하며 느낀 점

광해군에 대해 공부하며 다소 씁쓸함을 느꼈다. 군주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좋은 정책, 민심도 중요하지만 리더십 또한 매우 중요한 것인데, 광해군에게선 강력한 리더쉽을 찾을 수는 없었다. 만약, 아무리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도 광해군이 강력한 리더십을 가졌더라면? 서인세력을 자기 편 으로 만들었더라면? 그가 폐모살제를 하여도 국왕의 자리까지는 쫓겨나지도, 연산군과 같은 君으로 강등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광해군이 계속 집권하였으면 과거의 조선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도 더 강한 나라이면 나라이지, 결코 약한 나라로 바뀌지도 않았을 것이다. 필자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임진왜란 때 무너지고 다른 국가가 섰어야 하는데...’라는 말을 어릴 적 들었던 기억이 난다. 임란이 일어난 후 광해군의 집권한 다음..

역사 정리 2025.01.05

광해군의 과실은 무엇일까?

광해군은 즉위 후 왕권강화에 가장 큰 역점을 두었는데, 그 이유는 서자 출신에 둘째 아들이라는 출신에 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국왕의 위업과 전쟁 이후 땅에 떨어진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결과 새 궁궐을 짓기 위해 무리한 토목공사를 실시하였는데 궁궐 신축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세금을 과잉 징수하고, 폐모살제를 하였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과실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겠다.  1. 폐모살제 (廢母殺弟)  광해군이 폭군이라 불리는 가장 큰 이유는 친형인 임해군과 영창대군, 인문대비에게 행했던 폐모살제 입니다. 구체적으로 광해군이 주도했는지, 대북파가 주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선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반인륜적인 행위였습니다. 이 일이 인조반정의 대외적 명분으로..

역사 정리 2025.01.04

광해군의 공적 정리

그의 공적은 크게 왕이 되기 전과 왕이 된 후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세자일 적 그의 공적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1. 분조(分朝)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은 세자였기 때문에, 분조를 그의 공적으로 말하기는 힘들 수도 있지만, 분조라는 말 자체가 조정을 둘로 나누어서 광해군에게 국왕의 권한 일부를 위임한 것이기에, 분조도 충분히 광해군의 치적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당시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면서 벌였던 활약은 대단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성과는 백성들에게 조정이 아직도 건재 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이였다. 광해군의 활동은 임진왜란 초 일본에게 힘도 못 쓰던 조선 조정이 본격적으로 항전을 독려하고 전쟁수행에 나서는 시발점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광해군의 분조를 향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바야흐로 분조..

역사 정리 2025.01.03

광해군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정리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인물을 평가하는 데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다. 그런데, 어떤 기준에 따라서 내려진 평가는 수 백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다. 이런 잘못된 평가 속에 묻힌 역사 속의 인물을 재평가하는 작업이 최근에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얼마 전, 한 조사에서 ‘다시 재평가 되어야 하는 인물’에서 1위로 광해군이 선정되었다. 이러한 조사는 현재의 시대상황을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북한 등 여러 나라와 외교적으로 복잡한 관계이지만, 외교적으로 제대로 해결을 못할뿐더러 힘이 없다. 이러한 처지를 반영하여, 우리나라 역사상 광해군이라는 인물을 볼 때, 그는 명이 망하고 청이 부강하고 있는 시점에서 중립 외교, 실리 외교로써 탁월한 외교 정책을 펼친 몇  안 ..

역사 정리 2025.01.03

삼국사절요의 평가와 사학사적 의의

모든 책은 그 시대적 상황 혹은 찬자의 정치적 색깔이 반영되어, 글로 나온다. 동국통감도 세조대에 완성되었다면, 세조가 의도한 바로 그 책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삼국사절요가 세조가 원하던 책이라고 평가한다는 것은 잘못된 평가인 것 같다. 분명 세조대부터 시작한 것이지만, 세조가 이미 타계하고 두 번의 왕이 거친 후 출간되었고, 또 찬자인 서거정, 노사신 등은 세조와 의취가 부합하는 심복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세조가 의도한 사서와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사절요는 사학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첫째, 삼국사절요는 동국사략에 비해 주자학적, 도학적 명분론에 얽매이는 정도가 덜하고, 중국과 우리나라 역대문화를 비교적 폭넓게 포용하고 있다. 이는 세조가 억불숭유정책을 시행하지..

역사 정리 2025.01.02

삼국사절요의 특징은 무엇일까?

삼국사절요는 동국사략의 영향을 받아 삼국의 역사를 하나의 편년으로 서술하였지만 동국사략에서 성급하게 신라 중심적인 역사서술을 한 것을 좀 더 냉정하게 비판하여 이를 지양하고 삼국의 역사를 대등하게 서술하였다. 삼국은 당시 상호 독립된 국가였으므로 대등하게 써야 된다는 과거 당시의 사실을 보여준다. 또 연기 표시에 있어서 중국의 연기와 삼국의 연기를 모두 적고 모든 사건에 삼국의 명칭을 각각 붙어 서술하였다. 서문에서는 매년 중국의 연기를 앞에 썼는데 이것은 천자를 높이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연표에도 해당되는 것으로 연대를 비교하기 위한 방편으로 쓰여진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삼국사 절요에서는 동국사략에서 윤리적인 이유로 즉위년  칭원법을 유년칭원법으로 고쳐 쓴 것을 다시 삼국..

역사 정리 2025.01.02

삼국사절요, 제작 당시의 상황과 당시 역사가들의 인식.

우리나라에 정권이 바뀔 때마다 행해지는 것 중 하나는 대통령의 신화화이다. 가깝게는 지나친 아부라는 말이 많았던 이명박 대통령 신화가 있다. 가난한 집안 형편 속에도 기업사장이 되고, 서울 시장, 그리고 대통령을 지냈다는 이명박 신화가 바로 이것이다. 물론 절대적인 사실이고, 우리나라의 대통령으로서의 능력도 갖춘 사람이다. 허나, 대단한 것을 지나치게 부각해 오히려 국민들에게 반감을 일으킬 수 도 있다는 점이다. 이런 것은 현대에만 또 우리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고대부터 계속해서 이어져 왔고 어쩔 수 없는 필연적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한 나라의 우두머리인 사람이 평범한 사람보다는 원래 대단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부각하는 게 모든 국민과 과거의 백성들이 원하는 것이 아닐까? 옛날부터 새로운 국..

역사 정리 2025.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