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인물을 평가하는 데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다. 그런데, 어떤 기준에 따라서 내려진 평가는 수 백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다. 이런 잘못된 평가 속에 묻힌 역사 속의 인물을 재평가하는 작업이 최근에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얼마 전, 한 조사에서 ‘다시 재평가 되어야 하는 인물’에서 1위로 광해군이 선정되었다. 이러한 조사는 현재의 시대상황을 반영한 결과일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북한 등 여러 나라와 외교적으로 복잡한 관계이지만, 외교적으로 제대로 해결을 못할뿐더러 힘이 없다. 이러한 처지를 반영하여, 우리나라 역사상 광해군이라는 인물을 볼 때, 그는 명이 망하고 청이 부강하고 있는 시점에서 중립 외교, 실리 외교로써 탁월한 외교 정책을 펼친 몇 안 되는 군주로 알려져 있기에 그에 대한 재평가가 불거지는 것이다.
이번에 광해군의 일생과, 그의 공적, 실정에 대해 조사한 후 그에 대하여 재평가하겠다.
광해군은 조선 15대 임금(재위 1608~1623)으로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혼(琿)이며, 어머니는 공빈 김씨이다. 의인왕후에게 아들이 없자, 공빈 김 씨의 첫째 아들인 임해군을 세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성격이 포악하다고 하여 하지 않고,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난지 평양에서 서둘러 세자에 책봉되었다. 선조와 함께 의주로 가는 길에 분조를 설치하였고, 그 뒤 7개월 동안 함경도, 전라도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 군량미의 조달 등으로 난의 수습을 위해 힘썼다.
1594년 윤근수를 파견하여 세자책봉을 명나라에 주청 하였으나,서자라는 이유로 거절당하였으나, 1608년 선조가 죽자 왕위에 오르고 이듬해 왕으로 책봉되었다.
1606년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영창대군이 출생하자 선조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고, 소북파 유영경도 적통론을 내세워 선조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상황의 반전으로 유영경은 주살되고, 소북파는 몰락하였다.
유영경의 세자교체기도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은 그에 의해 축출되었던 북인의 다른 계열인 이산해, 이이첨, 정인홍 등이고, 이들은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정통을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어 대북이라 하였다. 1608년 즉위한 광해군은 당쟁의 폐해를 알고 억제하려다가 오히려 대북파의 권고로 임해군,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 영창대군, 능창대군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인목대비는 폐서인하여 서궁에 유폐시켰다.
1624년 서인 이귀, 최명길, 김자점 등이 능양군을 받들어 인조반정을 단행하여 이이첨, 정인홍은 죽이고, 광해군은 강화에 유배되었다가 청과 결탁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태안반도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다시 제주도로 유배하여 유배생활 19년 만에 사망하였다.
광해군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소재하는 생모인 공빈 김 씨의 묘 옆에 있다. 묘의 위치는 이정표도 없고 찾기가 어려운 낮은 산비탈에 위치하고 있다.
'역사 정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해군의 과실은 무엇일까? (1) | 2025.01.04 |
---|---|
광해군의 공적 정리 (2) | 2025.01.03 |
삼국사절요의 평가와 사학사적 의의 (1) | 2025.01.02 |
삼국사절요의 특징은 무엇일까? (1) | 2025.01.02 |
삼국사절요, 제작 당시의 상황과 당시 역사가들의 인식. (1) | 2025.0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