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정리

광해군의 공적 정리

씨리브로파파 2025. 1. 3. 21:40

그의 공적은 크게 왕이 되기 전과 왕이 된 후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세자일 적 그의 공적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1. 분조(分朝)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은 세자였기 때문에, 분조를 그의 공적으로 말하기는 힘들 수도 있지만, 분조라는 말 자체가 조정을 둘로 나누어서 광해군에게 국왕의 권한 일부를 위임한 것이기에, 분조도 충분히 광해군의 치적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당시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면서 벌였던 활약은 대단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성과는 백성들에게 조정이 아직도 건재 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이였다. 광해군의 활동은 임진왜란 초 일본에게 힘도 못 쓰던 조선 조정이 본격적으로 항전을 독려하고 전쟁수행에 나서는 시발점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광해군의 분조를 향해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바야흐로 분조는 민심을 수습하고 전란을 수행하는 구심점이 된 것이다. 또 한 선조의 ‘요동망명설’로 많은 실망과 충격을 받은 백성들에게 적과 싸우겠다는 의지는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백성들에게 ‘분조’는 바로 왕이 아직도 그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하나의 증거가 되었고, 적과 싸워 이겨야 할 명분이 된 것이다. 그리고 분조 당시 광해군의 나이는 불과 17세였지만 상처 입은 백성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분조를 이끌어 가는 그의 능력은 탁월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폐위된 후, ‘분조’의 활약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분조’는 조선이 건국한 이후 최대의 위기 상황에 몰렸던 임진년 한 해 동안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었으며, 의병을 지원하는 등 매우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2. 임진왜란 전후 복구 사업과 파당(破黨)

 

 현재 정치도 당에 따른 정치가 심하다. 조선시대도 그러하였다. 선조 재위 시기가 당파 정치가 심했던 시기들 중 한 시기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당파의 대립을 광해군은 비판하면서 선조 때 이미 뛰어난 행정 수완을 보인 바 있는 나이 많은 신하들을 당색에 관계없이 정승에 임명하여 조정을 이끌도록 하였다. 우리에게 오리정승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원익과 이항복, 이덕형 등이 그들로, 모두 남인 또는 서인에 속한 인물들이었다. 이로써 당분간 외교와 국방, 군사 측면에서 당대의 최고 대가인 이들이 국정 전반을 챙기는 가운데 대북과 소북 세력이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서인과 남인 소속 젊은 관료들이 그 주변에서 관직생활을 하는 국면이 전개되었다. 이들의 뒷받침 위에서 광해군은 대동법을 시행하고 동의보감을 편찬하여 전쟁 후 기근과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삶에 다소나마 힘을 주었다.

 우선, 대동법이라 하면 특산물을 바치는 제도인데, 농경지의 면적에 따라 쌀을 걷어 그 쌀로 특산물을 구입하도록 한 공물제도의 개혁이었다. 150만 결이 넘었던 농경지가 전쟁 후 54만 결만 남고 나머지는 황무지로 변해 있었고, 여진족의 후금 세력이 커져 가는 국제정세의 변화 아래서 군량미 비축 필요성까지 더해진 상황에서 조정은 가급적 쌀을 많이 거두어야 했다. 농민들로서도 방납과 대납의 폐해 때문에 제 값의 몇 배나 되는 돈을 주고 특산물을 사다 바치는 것에 비해 쌀로 대신 내는 것이 덜 부담스러웠다. 이러한 배경아래, 1608 5월 이원인의 건의로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대동법은 농민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고 처음에는 선혜지법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방납과 대납으로 큰 이익을 챙기던 여러 사람들의 저항이 거세었다. 이들은 대동법을 비방하는 것은 물론이고, 대동법을 중지시키려고 조직적으로 압력을 넣기도 하였다. 만약 정치가 당색의 이해관계에 따라 휘둘렸다면 대동법의 실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광해군은 선조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유배당한 허준을 불러 동의보감 이라는 의학서를 짓게 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약재로만 약을 지어서 약재 값이 상당히 비쌌고 돈 없는 사람들이 약을 먹는 것은 꿈과 같은 현실이었으나, 조선에서 나는 약재로 약을 제조할 수 있게 한 동의보감의 출간으로 만인이 약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전란 후 전염병을 비롯한 여러 질병이 만연하고 있던 때에 쉽게 구할 수 있는 토산 약재로 약을 짓는 처방을 내놓은 것은 곧 수많은 목숨을 구한 것이었다.

 또한, 임란 후 불타 버린 창덕궁, 경희궁, 창경궁을 준공했으며, 전쟁으로 불타버린 서적 간행에도 힘썼다. 《신증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등을 다시 간행했다.

 

3. 실리 외교 정책

 

 광해군의 재위시절은 명, 청 교체기로 들어서는 길목에 있었던 까닭에 동북아의 국제 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이렇게 급변하는 세계 질서를 세자시절부터 훤히 알고 있었는 듯하다.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 당시 함경도 지방에서 후금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명군의 군사적 능력과 부패 정도를 인지하였다. 광해군이 아는 것과 같이 이 당시 명나라의 국력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얻기 위한 것 외에는 아무런 이득도 없는 임란의 파병으로 약해진 반면, 후금은 세력이 점점 강해져 명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후금 토벌 작전에 나선 명은 조선에 지원군을 파병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명나라는 조선이 모셔야할 부모의 나라이자, 임진왜란 때 10만 대군을 지원한 은혜의 나라였으므로 조선이 지원군을 보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세를 알고 있던 광해군은 명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파병을 계속 늦추었다. 파병을 요청한지 4년 후 명은 후금에게 패하고 다시 조선에게 서둘러 파병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짐작한 후금은 광해군에게 중립을 요구하였지만, 광해군은 강홍립을 필두로 1만의 정예군을 출병시킨다. 하지만, 광해군은 명을 돕기 위해 군사를 출병시킨 것이 아니라, 후금과 싸우지 말고 싸우는 척하다 투항해버린다. 이 다음번의 명의 요청에는 1차 출정 때의 패배로 군력이 약해져 후금의 공격에 대비해 오히려 조선이 명나라로부터 지원군을 받아야 한다고 맞대응했습니다. 광해군 이렇게 명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탁월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는 한편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어느 쪽의 편도 아닌 중립 외교, 실리 외교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광해군의 태도가 후에 역사에 폭군으로 기억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바로, 부모를 저버리는 것은 조선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인데, 조선은 명이라는 부모의 은혜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