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은 즉위 후 왕권강화에 가장 큰 역점을 두었는데, 그 이유는 서자 출신에 둘째 아들이라는 출신에 관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국왕의 위업과 전쟁 이후 땅에 떨어진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결과 새 궁궐을 짓기 위해 무리한 토목공사를 실시하였는데 궁궐 신축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세금을 과잉 징수하고, 폐모살제를 하였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과실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겠다.
1. 폐모살제 (廢母殺弟)
광해군이 폭군이라 불리는 가장 큰 이유는 친형인 임해군과 영창대군, 인문대비에게 행했던 폐모살제 입니다. 구체적으로 광해군이 주도했는지, 대북파가 주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선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반인륜적인 행위였습니다. 이 일이 인조반정의 대외적 명분으로 부각되면서 광해군과 대북파에게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광해군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서자라는 이유로 명으로부터 왕위계승도 인정받지 못하였고,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은 동생이 임금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이야기하고 다니다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독살되고,적장자인 영창대군은 의젓하게 자라고 있었는데, 왕위에 올리려는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대북파는 사형을 청하나, 광해군은 유배를 보낸다. 그러나 영창대군은 구들에 데어 죽고 그 후 인목대비는 폐위되고 말았던 것이다.
2. 무리한 토목 사업
임진왜란 당시 경복궁과 창덕궁 등 주요 궁궐들이 불에 타버려 국왕들이 거처할 마땅한 궁궐이 없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그가 궁궐 건설에 열심이었다는 것은 그다지 이상할 것이 없지만, 창덕궁을 중건하여 거처할 궁궐을 확보한 이후에도 경덕궁과 인경궁 등 새로운 궁궐들을 대규모로 건설하는 공사를 벌였던 것은 무리한 처사였다. 이 때문에 전란 후 먹고 살기도 힘든 백성에게 과중한 노역을 부과했으며, 건설을 위한 과중한 세금을 거두어서 ‘분조’를 통해 얻었던 인심도 차츰 잃어갔다.
3. 은혜를 저버리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그의 실리 외교가 치적으로 오를 수 있지만, 과실로써도 오를 수 있다고 했다. 조선이 망하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행동 이었지만,유교 사회인 조선에서 위와 같은 행위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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